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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학년도 수능 시험이 끝난 후 언론에서는 영어, 생명과목II 과목에서의 정답 시비와 쉬운 수능(물수능?) 출제로 인한 난이도의 적절성에 대한 비판 기사를 연일 게재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수능 시험 출제와 관련한 다양한 개선안도 제안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반복되고 있는 현상이지만 수능날이면 모든 입시 기관들이 매 교시 과목별 수능 난이도를 예측하여 발표하곤 합니다. 수능 시험이 처음 도입된 1993년 이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물론 수능 시험이전에 실시했던 학력고사나 예비고사를 치를 때도 있었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표준점수라는 개념이 없었던 때라서 난이도가 지금보다 훨씬 중요했었습니다.)
수능 시험에서 난이도가 크게 문제되었던 것은 도입 첫해인 199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때였습니다. 그때(1993년)는 수험생들이 1년에 두 번 수능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고, 두 번의 성적 중 더 좋은 성적을 대학에 제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수능 원점수 성적을 활용하여 전형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어려운 시험과 쉬운 시험 간에 유불리가 크게 존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3년 시행 첫 해는 두 번 치른 시험 간에 난이도 차이가 심각하게 발생하여 두 번 치르는 시험은 1년만 시행되고 다음 해부터는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대학 전형시 원점수가 아닌 표준점수나 백분위를 활용하기 때문에 그때보다는 수능 난이도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격시험이 아닌 선발시험으로 활용되고 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그 기능상 수험생들의 수학능력을 바르고 정확하게 변별(辨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60여만 수험생들의 수학 능력 수준을 골고루 의미 있게 구별할 수 있는 시험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출제가 잘 된 수능 시험의 속성은 예언 타당도(predictive validity)*가 높고, 적당한 수준의 문항 난이도(item difficulty)와 문항 변별도(item discrimination)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현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적정 난이도를 유지하는 것은 좋은 시험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입니다. 물론 앞으로 현재의 수능 시험이 절대평가로 바뀌어 자격시험이 된다면 그때는 난이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절대평가에서는 난이도와 상관없이 수험생들이 목표를 성취했는지 아닌지만 구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수능 시험의 난이도가 주요 이슈가 되는 이유는 수능 시험의 본질과 관련된 일관된 원칙이 없고, 수능 난이도에 대한 이해 당사자들의 생각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근한 예로 과거 정부에서는 쉬운 수능을 표방하면서 과목별 만점자 비율을 1%로 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었는데 이 원칙이 작년부터 조용히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국어, 수학, 영어 과목이 A/B형으로 세분화되면서 목표를 맞추기가 어려워서 그랬을 것으로 추측해봅니다. 그리고 사교육비 절감이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도입된 EBS교재 70%연계 방침과 쉬운 수능 출제 방침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EBS 교재 연계로 국가에서 공인한 국정, 검인정 교과서로 공부하는 것이 불필요한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EBS교재 외의 교재를 사용하여 가르치면 학부모님들이 학교에 항의를 한다고 합니다. 일선 학교 각 교과 담당 선생님들이 호소하는 무력감이나 다양한 교재 사용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고등학교들의 주된 수업 방식이 EBS교재와 방송으로 획일화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능 시험이 중요 이슈가 되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수능시험이 일 년에 한 번 치르는 단판 승부의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제도에서는 초등 6년, 중.고등 6년 총 12년 동안의 학습 결과를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결정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12년 동안 배우고 익힌 국어 능력을 45개 문항으로 한 번에 구분해 낼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과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수험생들은 4교시 기준(국어, 수학, 영어, 탐구 2과목)으로 총 160문항에 대한 정답 유무에 따라 성적이 달라집니다. 12년 동안 배우고 익힌 수많은 학습 내용 중에서 불과 160개 학습 목표로 수험생들의 수학 능력을 구분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160개 문항마저도 EBS수능 교재 70%연계 출제로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70% 문항은 정답을 맞힐 수 있고, 나머지 30%문항만으로 수험생들의 수학 능력을 구분한다고 가정 한다면 그 문항 수는 50여 문항으로 크게 줄어들게 됩니다. 결국 수험생들이 12년에 걸쳐 노력한 결과를 하루 동안 50여 문항(과목별로 10여 문항 내외)으로 구분하게 되는 셈입니다. 적정한 수준의 난이도를 갖춘 문항들로 시험이 구성된다면 현재보다는 수험생들의 수학 능력을 보다 신뢰롭게 측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쉬운 수능 출제로 인해 한 번의 실수는 곧바로 재수로 이어지고, 재수는 또다시 삼수로 이어지게 됩니다.
앞으로의 수능 시험은 상대평가라는 목적에 부합되게 일정한 난이도와 변별도를 갖춘 시험으로 구성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대입 전형자료로서의 수능 시험은 너무 어려워서도, 너무 쉬워서도 안 됩니다. 쉬운 수능은 수험생들의 실력이 아닌 실수로 등급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변별력 있는 시험이란 상위 그룹에 속하는 학생들은 정답을 맞히고, 하위 그룹에 속하는 학생들은 오답을 하는 문항들로 구성된 시험을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학생들이 다 맞힐 수 있는 문항으로서 상위, 하위 그룹 학생들을 구분해 낼 수 없는 문항이라면 그것은 실패한 문항이기 때문에 문항 제작 과정에서 폐기하게 됩니다. 상대 평가에서는 변별력이 없는 너무 쉬운 문항들은 당연히 배제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이제는 원점수가 아닌 표준점수를 활용하기 때문에 1년에 두 번 이상 시험을 치르는 방안도 검토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수험생들에게 한 번 이상의 응시 기회를 주어서 그 중 더 좋은 성적으로 지원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마다 평가원에서 6월, 9월에 치르는 모의 수능 시험 중 9월에 치르는 모의 수능시험을 국가 수능시험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언 타당도(豫言 妥當度): 한 검사로서 미래의 어떤 기준변인을 얼마만큼 예언하느냐 하는 정도(교육학용어사전, 하우). 예를 들어,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좋으면 좋을수록 대학에서의 학점 성적도 그만큼 좋을 것으로 예측하였는데 실제 결과도 그렇다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수험생들의 미래의 학점을 예측할 수 있는 타당도 높은 시험이라고 할 수 있음.
학교학습과 교육평가, 황정규, 교육과학사